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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프닝

익명

유독 날이 좋았다. 여름치고는 크게 덥지 않은 날이었던데다가 큰 의심 없이 제 타겟인 가족들을 속여냈고, 그 학생의 방에 카메라도 능구렁이 담 넘듯 하는 것보다 훨씬 간단하고 손쉽게 설치한 데다 멍청한 아버지란 작자 덕분에 돈도 수중에 두둑하게 들어왔다. 게다가 오늘은 제 앙큼하고 까칠하지만 놀리는 맛도 함께 있는 재미도 있는 애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예정이었다. 최근 제가 바쁘다며 보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오랜만에 만나기 때문이었다. 집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며 (다소 일방적이게) 약속을 잡았다. 요시모토가 생각하기엔 제 애인에게 수락도 받아냈으니까 아무런 문제 따위는 없는 것이었다. 아. 오늘은 정말로 물 흐르듯 순조롭게 흘러간 하루였다. 손도 안 풀고 코를 푼 것 같은 이 느낌!


 

요시모토가 다신 없을 것만 같은 즐거움을 느끼며 히죽헤죽하는 예의 그 얼굴로 오늘 찍은 사진들을 확인하며 차도에 서 있었을 때 어떤 아이가 제게 뛰어와 그의 팔꿈치를 쳐 실수로 차도로 휴대폰을 떨구고, 그 휴대폰이 마침 지나가는 택배차의 바퀴에 딱! 깔려 박살 나버리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요시모토는 그렇게 단숨에 휴대폰을 잃었다. 요시모토는 조금 짜증이 났으나 그래도 괜찮았다. 제 영상 자료나 사진 자료들은 다른 곳에도 많은 데다 모을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밥보다 더 쉽게 (어쩌면 밥보다 훨씬 많이 구해 먹었을지도. ) 구하는 것들이었으니까 아쉬울 건 없었다. 오늘 찍은 사진들은 USB에 들어있기도 했고, 오늘 얻은 사진들을 전부 잃는다고 해서 앞으로의 일에 차질이 될 것들이 없었다. 그리고…. 한번 이렇게 쉽게 구한 것을 두 번이라고 못 구하려고? 그렇다고 그냥 맨손으로 휴대폰을 집기엔 휴대폰은 정말 산산조각이 나버려서는 발로 톡 치기만 해도 유릿가루가 우수수 흩어졌다. 그냥 들었다간 필시 제 손에 바닥바닥 박혀서는 빼내기도 힘들 터였다. 요시모토는 고민하다가 가방 속을 뒤져 대충 휴지 뭉치 같은 것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고는 예의 걸음으로 신이 난 척 걸어갔다. (그리고 정확히 아홉 시간 후에 울 듯하며 후회했지만 지금의 요시모토가 알 길은 없었다.) 게다가 이런 일은 재수가 없으면 한 번쯤은 일어날 수 있지 않은가? 그냥 운이 좋지 못한 어느 날의 해프닝이었다.


 

그래. 정말로 그냥 흔히 있을 해프닝이었을 뿐이다. 해프닝이 커지고 커져 단순한 해프닝이라고 치부되기엔 과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시작은 그저 해프닝이었다.


 


 

*


 

유독 날이 나빴다. 오늘 열었던 가게 손님이 매우 징징거리며 깎아달라 난리를 쳤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셋씩이나! 돈이 없다며 한 번만 봐달라고 처자식이니 뭐니…. 가족을 팔아가면서 제게 구걸했다. 그리고 그 손님을 따라서 다른 불청객들이 가게 앞을 막아서서는 문을 쾅쾅 두드리고 소리를 질러대기까지 했으니, 분명 좋은 날은 아니었다. 분명 제 가게는 소개제 일 텐데. 어쩌다 이런 어중이떠중이에 알지도 못하는 인간이 짜증 나는 짓을 하는지…. 조만간 제 고객들을 다시 점검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더니 마지막으로 가게에 온 손님은 물건을 사지도 않고 도망쳤다. 제가 불청객과 대화를 하는 사이를 틈타서 말이다.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도 이것저것 소리를 들은 뒤에야 그들은 사라졌다. 애써 손님을 받았더니 돈도 받지 못하고 좋지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머릿속에서 최근 소개받은 손님들을 생각해냈다. 단골들이야 저를 아니 이런 일을 일으킬 사람을 추천해서 보내줄 리 없다며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아오토씨였다. 오늘도 밀실이 생긴 모양이었다. 슬슬 아오토나 세리자와와도 연을 끈을 준비를 해야 하는데 따위의 생각을 하며 전화를 받았다. 세리자와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저를 믿어준다고 하더라도, 저를 낫게 봐준다고 하더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들은 선함의 편이고 자신의 모든 것을 전부 봐줄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지금 또한, 내가 말을 하지 않아서 그들이 직접 보지 못해서 날 어쩌지 못하는 것 뿐일 터였다. 게다가 사람은 언제나 사소한 것으로도 틀어질 수 있는 것이니까. 오해 하나로 사람은 바닥까지 떨어질 수 있다. 에노모토는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어서 더 이상의 깊은 관계 따위는 갖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연인 또한 (연인이라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아무리 그래도 매우 일방적으로 보이는 관계인데. 그리고 에노모토는 아직도 자신이 사랑한다는 확실한 정의를 하지 못했다.) 원치 않았던 것이었다. 매우 일방적으로 시작된 관계였으나 허투루 할 수는 없는 관계이기도 했다. 자신의 약점을 잡은 사람인 데다가 엄청난 또라이니까. 어떻게 어디로 튀어서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아오토씨와 약속을 잡은 뒤 확인해 본 시계는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으니 암만 보아도 오늘 (아주 일방적으로 잡힌) 약속에 늦을 성싶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메일을 보내거나 전화를 하는 게 일반적이었으니 오늘도 에노모토는 평소처럼 메일을 넣었다. 전화를 걸기엔 귀찮고, 무척이나 낯간지러운 일이었으므로. 오늘 늦을 것 같습니다. 라는 단순한 문자이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할 터였다. 어차피 돌아가고 나면 다 이야기할 것들이었으니까. (그리고 정확히 여덟 시간 뒤 에노모토에게 크게 화날 일이 생겼으나 어찌 알겠는가? 에노모토는 미래를 볼 수 있는 인간이 아닌 것을.) 별일이 아니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정말로 평화로웠다. 정말이다. 조금 짜증은 났으나 별일은 아니었고 심각하지도 않았다. 그냥…. 평소에도 자주 있던 일이었다.


 


 

*


 


 

사실 그리 별일은 아니었다. 에노모토는 메일을 보냈으니 그냥 그대로 일을 끝낸 것뿐이었고 요시모토가 휴대폰이 부서져 그가 보낸 메일을 확인하지 못했을 뿐이다. 하지만 시간이 훌쩍 지나가도 오지 않는 제 연인에 화가 난 요시모토가 어마무시한 얼굴을 한 채로 에노모토의 작업실의 보안이나 물건 몇몇 개를 때려 부순 뒤 흉흉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고 에노모토는 약속했던 문자대로 둘의 거처로 가 요시모토를 기다렸을 뿐이다. 약속을 잡았다가도 아무런 연락조차 오지 않는 요시모토야, 에노모토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으므로 오늘 잡은 약속도 결국 파토되었나보다 하고 여기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하였다. 요시모토가 그렇게 학습되도록 해놓은 것이었으니까. 이럴 땐 요시모토에게 전화하거나 이야기를 해서 화를 내거나 따진다고 하여도 그는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으니 하등 쓸모없는 짓이었다. 때문에 에노모토는 이 일로 더는 제 감정을 소모하고 싶진 않았다. 생각하고 곱씹어봤자 제게 손해만 될 것이었으므로 생각도 정리하고 마저 하던 것도 마무리 지을 겸 에노모토는 제 작업실로 왔다가 더 큰 스트레스를 마주하고 말았다.


 

개판 난 자신의 작업장과 그 가운데 한껏 화난 표정으로 화가 나 있는 요시모토에 영문도 모르고 박살 난 자신의 물건들과 자신의 일터를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던 것이었다. 약속을 자기가 해놓고 말도 안 했으면서. 아무런 연락도 언질도 주지 않았으면서 갑자기 이렇게 잔뜩 성난 소처럼 자신의 것들을 모두 망가뜨리고 부셔놓아서는 생업에 큰 차질이 오게 만들었단 말인가? 왜? 에노모토는 머리가 띵해지는 것을 느껴왔다. 이래서는 안 되었다. 제가 잠가놓은 것들도 용케 잘도 부숴놓아 돈도 못 벌게 생겼다. 꼼짝없이 내일은 일은 못하는 것이었다! 내일이 뭔가. 며칠이고 못 하게 생겨버려서는, 이건 큰 손실이었다. 지금까지 참아온 에노모토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이 뭘 잘못했단 말인가? 제 임의대로 늦는다고 한 것? 하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으면서. 심지어 자신은 밥 먹듯이 약속을 어기고 시간도 어겨놓고선 능청스럽게 웃으며 들어왔으면서 저에게만 이런단 말인가? 어쩌면 손버릇도 말버릇도 하반신의 버릇도 나쁜 이 망할 애인과는 헤어질 때가 온 것일지도 모른다. 하며 에노모토가 분노로 가득 차 서슬 퍼런 눈을 하며 제 부서진 물건들을 보고 이런저런 생각을 할 때. 요시모토도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요시모토는 오늘 기분이 매우 더러웠다. 아닌 척 괜찮은 척했지만 휴대폰이 박살 난 것은 꽤 큰일이었다. 귀찮은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휴대폰을 다시 어떤 명의로 어떤 돈으로 다시 구한단 말인가? 보증금을 물고 왜 이렇게 부서졌는지 알아야 하고 어쩌고저쩌고.. 제 명의로 만든 휴대폰이 아니라서 더 그랬다. 제 명의가 아니니 이렇게 귀찮을 수가! 건더기 없이 이런 짓을 하고 다니려면 어쩔 수 없는 것이었지만…. 자연스럽게 바꾸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부서진 거면 정말 귀찮은 것들이 많았다. 그런 상황에도 약속은 했으니 이번만큼은 바빠도 케이쨩이나 보러 가야지~ (라고는 하지만 연락할 수단이 없어 언질도 줄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오긴 와야 했다 말없이 약속을 그냥 파토낸 경험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다. 유독 오늘 더 양심이 찔려왔다는 탓이긴 했지만.) 하고 왔는데…. 아무리 약속 시각이 지나도 에노모토가 오지 않는 것이었다. 제 앙큼하고 깜찍한 애인이었지만 그놈의 입은 매를 벌고 다닐만한 입이었기 때문에 요시모토는 슬그머니 걱정이 되가고 있었다. (자신의 입은 생각도 하지 않고서.) 그리고 어쩌면 그 변호사들과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요시모토는 신나서는 오랜만에 제 애인의 작업실로 향했다. 그리고 웬 장정의 사내들과 마주해버렸다.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문을 쾅쾅 차대는 남자들을 보며 요시모토는 이게 무슨 일인가 잠시 고민했다. 드디어 도둑질이 취미인 제 애인이 큰일이라도 만든 건가? 싶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기다리기를 한참. 아무리 기다려도 에노모토는 그 가게에서 나오지 않았고,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문뜩, 요시모토는 생각났다. 에노모토의 취미(?)는 소식 없이 훌쩍 이 나라를 떠났다가 잠적해버리는 것이었고, 그때엔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그것을 생각한 요시모토의 머릿속이 싸해졌다.


 

제게 언질도 없이 이 나라를 떴다는 건가? 아무런. 증조도 없이?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먼저 에노모토를 떠나는 건 되어도, 에노모토가 요시모토를 떠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었다. 제가 먼저 흥미를 잃고 그에게서 멀어지지 않는 이상 그는 저를 어쩌지도 못하고 참아내기만 해야 했을 터인데. 생업에도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었던데다 요즘 에노모토가 제일 구하고 싶어 하는 것은 요시모토에게 있었다. 그걸 포기하고, 이 나라를 떴다는 건가? 요시모토는 에노모토에게 저를 떠날 수 없는 이유를 만들어 놓았다. 아무리 제가 막무가내고 무작정이라고 하더라도 에노모토에겐 요시모토 같은 사람이 처음이었다. 상처를 주고 무조건 떠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싫어해도 옆에 붙어있고 결국 정에 메마를 수밖에 없는 에노모토에게 요시모토는 밉든 좋든 정이라는 것을 주었다. 그게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어떤 형태로서든 에노모토는 요시모토를 기다리고 참아줄 수밖에 없는 거였다. 크게 선을 넘지도 않았으니 어쩔 수도 없는. 그리고 그것에 보기 좋게 걸려들어서는 어찌할 줄 모르는 것 같아 보이더니…. 이렇게 떠나버린다고? 요시모토는 참을 수 없었다. 그럼 지금 가지고 놀려진 게. 에노모토가 아니라 자신이었다는 건가? 요시모토는 비죽거리는 제 입술을 어쩔 수 없었다. 목과 손에 단단하게 힘이 들어가고 뒷목이 빳빳하게 당겨져선 시야도 넓어졌다. 요시모토는 이게 무엇인지 아주 잘 알았다. 이것은, 참을 수 없는 분노였다.


 


 

*


 


 

이 분노는 어찌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들이 아니었다. 요시모토도 에노모토도 말이다.


 

요시모토는 에노모토가 자신을 떠났다고 생각했다. 아주 제멋대로. 허락도 없이. 제가 훈련해놓은 것들도 내팽개치고서는 아주 깔끔하게 저를 잊었노라고. 그래서 화가 나 뻔뻔해 보이는 그의 작업실들 속 물건들을 망가뜨려 버린 것이었다. 진정으로 에노모토가 떠났다면 그곳은 텅 비어있었을 테지만 눈이 돌아간 요시모토에겐 그런 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공들인 것이 망가진 건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생각도 들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요시모토는 에노모토에게 요구한 것만큼을 자신에게도 요구하고 있었다. 에노모토가 그렇게 되게끔 학습시키면서도 자신 또한 그렇게 학습시켜버린 것이었다. 요시모토의 고의는 아니었으나, 요시모토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정상이 아닌 사람이 에노모토 뿐만이 아니었으므로. 정에 고프고, 누구보다 사실 타인과 연결되고 싶어 하고…. 이런 일들로 위안으로 삼고 받고 싶었던 것은 요시모토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자신 그 자체로 살아가지 못하는 삶은 망가지고 고장 나 결핍으로 채워져 무엇하나 담을 수 없게 되었으니 변덕으로 채워지지 않을 것을 채워 넣어지는 척이라도 하는 것은 상당한 위안이 되고 조금의 현실도피라도 가능케 해주는 것이었으니까. 그 때문에 요시모토는 많이 몰려나 자신이 자신이 아니게 될 것 같은 때, 자신이 요시모토로서 있지 못하게 될 것 같은 때에 에노모토를 찾았다. 제 정체를 묻지도 않는다. 성가시게 하지도 않으며 내가 무엇을 하던 자기 할 일만 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완벽하게 타인과 차단된 사람일수록 손에 넣고 싶어지고…. 혼자서도 잘 있으면 손을 댈 필요도 없으니 안성맞춤이 아닌가? 요시모토는 망가진 사랑과, 망가진 마음. 뒤틀린 것과 같이 온통 비정상인 것들로 가득 채워 제 연인을 대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제 애인은 제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까. 제 애인 또한, 저를 같은 방식으로 대하고 있으니 서로는 버틸 수 있었고 서로 연인의 울타리로 남을 수 있었다. 서로가 정말로 '사랑하는 사이' 가 될 수 있던 것은,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있어 평범했기 때문이다. 다른 평범이었고, 타인에겐 비 평범이었다. 닮은 것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둘은 평범하지 않으나 둘만 있을 땐 서로가 평범했다. 그리고 그것을 빌미 삼아 지금까지 만났고, 만나왔던 것인데….


 

에노모토는 이제 요시모토에게 혐오 말고는 느낄 수 없게 되어버렸노라고 생각했다. 그를 이해하려고 해본 적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 왜 연인이란 사람을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인가? 에노모토는 사람 관계에서는 이해보단 이해하기를 선택하는 편이었다. 혹은 이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받아드리기'는 할 수 있었다. 무얼 해도 에노모토에게는 받아드리는 선택지 말고는 선택할 수 없었다. 이해하고 이해를 바라는 일도 내 일에 대한 것을 상대방이 이해하기를 바라는 것도 이골이 난 데다가 크게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제게 피해가 오지 않거나, 제가 그것을 이해하거나 이해해야만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하등 쓸모없는 것이었으니까. 남이 원하는 것을 대충이라도 따라주면 편했다. 더는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 없으니까. 그 과정에서 저는 제가 원하는 부분을 찾아 제 마음대로 해오곤 했다. 제 도움은 선의가 아니었고 무조건 도와주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제 연인이란 사람과 했던 것은 그가 원하기 때문에 당해주던 것뿐이었다. 저를 학습시키면서도 제가 학습되는 꼴이 우스워서 알려주지 않고 자각하지 못하게 그저 따른 것도 있었다. 굳이 제가 알려줄 필요는 뭐 있단 말인가? 제가 자초한 일인데. 에노모토는 아무리 어떤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자신이 자초한 일을 알려주거나 해결해주거나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뭐든 이해타산에 맞아야지만 해결해주고는 했지. 그가 그의 행동에 스스로가 학습되어 가는 것은 그라는 밀실을 풀어내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미 눈에 훤히 보였으니까. 그리고 그는 무언가를 먼저 말해주고 이해시켜줄 만큼 친절하지도 않았다. 이게 일도 아닌데 뭐하러? 아무리 짜증 나는 짓을 해도 결국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결정적인 선은 넘지 않으니까. 그래서 요시모토를 놔두고 있었던 것이고 요시모토의 애인학습에 동참했던 것뿐이다. 그리고 오늘 그가 선을 넘은 것이고. 에노모토는 자신이 보기에도 요시모토가 보기에도 하등 상관없는 타인이 보기에도 많이 참아왔고 참아주었다. 에노모토 또한 인간이었고 감정이라는 것이 있었다. 겉보기로 크게 드러내지 않더라도 그가 크게 표현하지 않더라도 그에게는 착실하게 그동안의 것들이 쌓여왔고, 눌려왔을 뿐이다. 그 눌러 담은 감정들이 있음을 요시모토 또한 모르지는 않았다. 정말로 아슬아슬하게 즐기고 놀려오고 있을 뿐인 관계였으니까. 놀이 같은 학습 속에 연인이라 포장된 채로. 그리고 드디어 오늘 그 포장이 갈기갈기 찢겨버린 것뿐이어서.

둘이 그 한밤중이 다 되어가는 어스름한 시간에 싸우게 된 것은 정말로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정말로?)


 


 

*


 


 

요시모토는 에노모토와 눈을 맞추자마자 비죽 웃었다. 도망은 간 게 아닌가 보군. 머릿속에선 새로운 정보가 기재되었으나 그리 큰 도움이 된 건 아니었다. 이미 분노로 가득 차 있었는데 뭐 별다른 바가 있겠는가? 그냥 잠식되고 말아야지. 요시모토는 비죽, 웃더니 무슨 기름칠이라도 덜 된 기계마냥 삐걱대듯 일어났다. 그렇게 바라보이는 에노모토는 차갑게 타오르며 절 죽일 것같이 쳐다봤더란다. 어이가 없어 큭큭 웃음만 나왔다.


 

"에노못쨩. 왜 그리 화가 났어?"


 

왜. 화가 났냐고.


 

하고 싸늘하게 웃음도 지운 채 에노모토를 바라보는 요시모토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이 분노가 향해야 하는 것은 에노모토가 아니었다. 제게 향해야 할 분노였고, 제게 향해있던 분노였다. 제가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난리를 쳐댄 것이 맞았다. 저는 이렇게 에노모토의 공간에 와서 난리를 칠 게 아니라 제가 언제나 애용하던 그 학교의 반 따위에서나 이랬어야 했다. 사실 에노모토가 잘못한 것은 어디에도 없고 결국 그냥 화풀이하고 있는 것일 뿐인데. 이것은 잘못된 일인 것일진대. 요시모토는 회피할 곳이 필요했다. 회피하고 싶었다. 넘어가고 그의 잘못으로 넘기고 싶었다. 네가. 알아차리게 했잖아. 네가 날 이렇게나 망가뜨렸잖아. 난 이 가면을 망가뜨리고 싶었던게 아닌데. 네가 결국. 내가 결국….


 

"지금."


 

"왜. 화가 났냐고. 물으셨습니까?"


 

에노모토는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지금 자기가 해놓은 짓은 보이지도 않는 건가? 지금. 이야기도 다 했는데 혼자서 제 생활을 망쳐놓고 제가 억울한 사람이라도 된듯한 시선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는 저게 진짜 사람이 맞나? 드디어 미쳐버린 건가? 어쩌면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그냥 경찰에 무단 가택침입에 손괴죄로 신고를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아니며 그냥 정신병원으로 데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정말로 에노모토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가 도대체 뭘 잘못했길래? 그냥 자신을 방치해둬서? 망가지는 꼴을 보고도 내버려 둬서? 하지만 그건 결국 자신이 자초한 일이 아니던가? 결국, 자신이 원해서. 결국,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하고 싶었던 욕망을 표출할 방법으로 자신을 선택한 것이 아니던가? 에노모토는 이 순간 사랑이라고 포장되어지는 모든 것들은 정말 거짓에 엉터리이고, 무엇보다 망가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 또라이같은새끼…. 이딴 걸 사랑이라고 하고 있단 말인가? 진심으로?


 


 

"지금. 멋대로 제 생업에 지장이 가게 보안도 망가뜨려 놓으시고 난리를 쳐놓은 게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하지만. 그건 에노못쨩이 약속도 안 지키고 오지도 않았으니까~ 정당방위였지…."

"당신은. 약속을 안 지키시는 게 한두 번도 아니시면서 제게만 그런 걸 적용하신단 말입니까?"

"에노못쨩."

"뭡니까. 제가 언질도 드리지 않은 것이라면 좀 억울한 게 덜할까 싶습니다만. 연락도 받지 않고 이런 식으로 행동하시는 게 맞다고 보십니까?"

"..........연락?"

"....이젠. 확인도 안 하십니까?"


 

에노모토는 기가 차서 진심으로 더는 대화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고 요시모토는 이제서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큰 생각이 들었다. 아.


 

요시모토는 그제야 기억해냈다. 저는 휴대폰이 망가졌고 연락을 받을 상황이 아니었고 그건 에노모토는 모른다는 것을. 이게 전부 휴대폰이 망가진 탓이었다. 지금 그러면 자신은 정말로…. 망치로 머리를 한 대 거세게 맞은 느낌이다. 아무리 봐도…. 누가 봐도 저는 지금 천하의 몹쓸 쓰레기였다. 특히나 에노모토의 입장에서는 정말로. 진심으로.


 

에노모토는 진짜 이젠 대화를 나눌 수도 없어졌다고 판단했다. 아무리 답도 없는 또라이새끼라고해도 이건 선을 넘었다. 넘어도 한참 넘었다. 믿었던 게 이런 식으로 돌아온 거란 말인가? 제 선은 넘지 않으니 그래도 괜찮다며 어찌어찌 여겨주고 있던 마음이 이렇게 배신당한단 말인가? 역시 인간은 믿을 것이 못 되었고 특히나 저렇게 다가왔다가 제 마음대로 마구 헤집고 나가는 인간은 특히나. 더더욱 상종해서는 안될 유형의 것이었다고 뼈저리게 느끼는 바였다. 저딴 인간. 다신 만나지 않을 거다.


 

에노모토는 잔뜩 혈압이 올라 핑 도는 머리를 부여잡고 더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뒤 대충 뒤를 돌고 축객령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 다급하고도 멍청한 요시모토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에노모토는 진짜 차라리 기절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케이쨩…. 잠깐만 뒤 좀. 돌아볼래…?"

요시모토는 정말 X 됐다는 듯한 얼굴로 제 휴대폰을 들어 보였다 박살 나서는 경우 형체나 유지하고 있는 그놈의 휴대폰을!


 

에노모토는 정말로 진짜. 차라리 그냥 한 대 후려치고 개싸움이 나든 뭐든 경찰에 잡혀가고말지라고 생각했다. 망할 새끼가 지금 뭘 보여주는 거지?


 

"지금."

"제 연락을 못 받았다고 이야기하고 싶으신 겁니까?"

"그게요…. 저…. 에노못쨩…?"

"연락도 못 받으시고 혼자서 빡치셔서"

"..."

"제. 생업을. 박살 내셨다. 이 말입니까?"

XXX. 에노모토의 머릿속엔 딱 그 세글자만 떠올랐다.


 


 

*


 


 

결론적으로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요시모토는 제가 꽁꽁 숨기고있던 에노모토가 갖고 싶었던 것을 바로 내다 바쳤고 에노모토가 받은 손해에 대한 보상금과 앞으로의 약속 따위를 하고 겨우 에노모토의 화를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에노모토는 과하게 그의 돈을 뜯어먹었고, 요시모토는 발끈하다가도 받아들였다. 언제나 급한 것은 저였다. 당분간이 뭔가. 한동안은 에노모토에게 설설 기어야 할 것이다.

요시모토는 제 휴대폰을 박살 낸 그 꼬맹이. 꼭 찾아낸다고 생각하다가 에노모토가 저를 부르는 소리에 부리나케 대답하며 달려갔다. 어찌저찌하더라고 해도 둘은 계속 연인인 모양이다.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두 사람에겐 이게 정상일 테니까. 그리고, 이건 결국 해프닝이었을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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