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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덫에 걸려버렸습니다

​바르

   선명한 햇빛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렀다. 온몸이 햇빛의 온기로 달아올라있었다. 늘어진 몸에 살짝 남아있던 힘까지 전부 다 빼버리면서 눈을 아주 천천히 떴다. 기분 좋은 나른함이었다. 정갈하게 덮여있는 이불은 포근했고 눈을 살짝 비껴 얼굴을 데워주고 있는 햇살도 부드러웠다. 그런 것들을 전부 다 충분히 느끼고나서야 제대로 눈을 뜬 사쿠라이는 너무 놀라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젠장, 이거 내 이불 아닌데. 라는 혼잣말이 머릿속을 쿵쿵 치며 울려퍼졌다. 다 뜨이다 못해 동그래진 눈을 데굴 굴려 옆으로 보내자 사쿠라이는 큰일났음을 한 번에 알 수 있었다. 그가 누워있는 침대는 어제 비즈니스로 만났던 화가 오노 사토시의 것이었다.

 

   "나 무슨 짓을 한 거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얼굴을 한껏 찡그려봤지만 기억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 설마, 하고 최악의 수를 그리려는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오노가 아기같은 미소를 한껏 지으며 천천히 눈을 떠 사쿠라이를 쳐다보았다.

 

   "잘 잤어요?"

 

   너무나도 안정적인 목소리로 자연스러운 아침인사를 건네는 그가 사쿠라이는 당황스러웠다.

 

   "지금 잘잤냐는 말이 나와요? 나, 나는 지금 정말 당황스러운데...?"

   "왜 그렇게 놀라요, 본인이 와서 자겠다고 해놓곤."

   "제가...? 그랬다고요? 당신 집에서 자겠다고?"

   "전혀 기억이 안 나는 모양이네. 어제 뒷풀이로 간 술집에서 술에 진탕 취해가지곤 제대로 걷지도 못했잖아요."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게다가 사쿠라이는 본인이 그런 무모한 짓을 벌였을 거라곤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거짓말이었다. 실상은 오노의 꼬임에 넘어간 한 마리의 먹잇감인 것이었다. 속으로는 계획대로 됐다며 웃음을 멈출 수 없었지만 겉으로는 완벽하게 차분한 목소리를 냈다. 커다란 철 장벽처럼 단단해보이는 그를 넘어오게 하기에 오노 생각엔 이런 해프닝밖에는 답이 없었다. 사쿠라이가 당황스러워하는 모습까지도 완벽하게 즐기고 있었으므로 오노는 만족감으로 가득했다.

 

   "아침 먹죠? 설마 둘이라 싫다거나,"

   "아, 아니에요. 좋아요. 먹죠, 아침."

 

   오노가 식탁 위에 놓인 봉지의 빵끈을 풀고 빵 두조각을 꺼내 토스트기에 넣었다. 타이머가 줄어드는 시간을 보여주는 사이에 빠르게 버터와 잼도 꺼냈다. 그리곤 계란도 4개 꺼내 바로 프라이팬을 들었다.

 

   "빵 나오면 접시에 담아줘요. 접시는 찬장에 있는 거 아무거나 쓰고."

 

   사쿠라이의 눈에 비친 오노는 아주 능숙했다. 마치 누군가와 길게 동거한 경험이 있기라도 한 듯. 하지만 그가 보기와는 다르게 플레이보이였던 것인가 고민을 하는 사쿠라이의 모습을 오노가 보기엔 만족감 그 자체일 뿐이었다. 일련의 정돈된 동선과 자연스러운 진행은 모두 사쿠라이를 집에 데려오기 2주 전부터 연습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틀어짐 없이 그를 넘어오게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맛있네요. 참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아침까지 차려주시고…”

   “고마우면 있다가 점심 사줘요.”

 

오노가 용기를 내 치고 들어갔다. 점심을 사달라고 하는 게 별 거 아니게 보일지 몰라도 오노의 머릿속에서 그 말은 하루의 반 이상을 같이 있어달라고 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에 이미 심장박동에는 흥분이 묻어있었다.

 

   사쿠라이와 오노는 비즈니스 관계로 만났다. 오노는 화가였고 인물화를 그리기 위해 모델인 사쿠라이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의 탄탄한 몸이며 뚜렷한 이목구비가 그림그리기엔 딱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렇게 만나 처음으로 어색한 인사를 나누며 오노는 확신했다. 자신이 첫눈에 그에게 반해버렸음을. 신사적인 말투와 행동, 넓고 깊은 마음씨에, 가끔 던지는 농담 뒤에 부끄러워하는 귀여운 모습까지 전부 다 오노의 취향에 딱 맞아떨어졌다. 얼굴까지 완벽하니 오노는 더 이상 뒤로 물러날 순 없다고 생각하고 곧장 돌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몇 달을 계속 사쿠라이와 함께 작업했고 그렇게 열게 된 인물화 전시회 뒷풀이에 그를 초대했다. 다른 작가들에게도 간단히 소개할 참이었지만 진심은 다른 데 있었다. 그와 한 번쯤 자보는 것. 뜨거운 하룻밤을 지내진 않더라도 느긋하게 자신의 집에 초대해 어필을 해보리라는 욕심이었다. 사쿠라이는 정말로 뒷풀이 장소에 나타났고 오노는 지금이 기회라는 생각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에게 사글사글 웃으며 말을 걸고 술을 권하고 나른하게 취한 듯 보였을 때 바로 미끼를 던졌다.

 

   “조금 취한 것 같은데, 오늘은 우리집에서 자는 게 어때요?”

   “아, 아이 괜찮습니다. 집까진 갈 수 있어요.”

   “오늘 제가 만든 자리에 와준 것도 너무 고맙고 다른 작가들은 전부 돌아갔으니 눈치도 볼 필요 없어요. 침대도 두개나 있으니까. 괜찮죠?”

 

   그의 끝없는 물음에 사쿠라이는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작업을 항상 집에서 한 탓인지 꽤 취한 그는 오노의 생각보다 빠르게 넘어와주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한 침대에서 그를 만끽한 후 몰래 지낸 오노의 새벽이 지나 함께 빵을 먹고 있는 참이었다.

 

   아침까지 다 먹고 이젠 커피 차례였다. 오노가 손수 내린 드립커피가 어느새 사쿠라이의 눈앞에 나와있었다. 어디까지 얻어먹어도 될지 망설이는 눈치의 사쿠라이는 싱글벙글 웃으며 자신을 쳐다보는 오노를 발견하고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잔을 들었다.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이고 살며시 잔을 내려놓은 사쿠라이의 눈빛이 어딘가 변해있었다. 휙 들어올린 고개에는 빛을 머금은 눈동자가 있었고 그것들은 확실하게 오노를 응시했다. 앵두빛을 한 입술은 시선을 잃지 않은 채 천천히 열렸다.

 

   “어젯밤에는, 왜 좋아한다고 말 안 했어요?”

 

   오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커피를 싫어한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드립까지 해준다는 건 역시 저에게 맞춰준다는 거겠죠.”

 

   사쿠라이의 빠른 눈치와 사전지식에 오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 행동이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올 거라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기까지 했다. 머리가 좋다더니 어쩔 수 없었나, 하고 오노는 중얼거렸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거절당할 수도 있는 최악의 상황이 오노의 머릿속에서 조금씩 그려지고 있었다.

 

   “왜 말 안 해줬어요? 나 어제 그거 들으러 간 건데.”

 

   그의 입에서 오노의 상상과는 정반대의 이야기가 나온 바람에 오노의 머리는 일순 정지했다. 분명 정중한 거절이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으나 실제로 들은 말은 거의 고백과도 같았다. 그를 집으로 데려와서 한 침대에서 자게 하고 아침까지 챙겨준다는 작전이 허무하고 하찮게 느껴짐과 동시에 차이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함께 밀려왔다.

 

   “어, 언제부터…?”

   “글쎄, 한 세번째 작품부터?”

   

   오노가 개인전에 출시한 작품은 사쿠라이가 모델인 것만 총 11점이었다. 꽤나 오랫동안 숨기고 있었단 얘기였다.

 

   “도대체 왜 얘기 안하고 있었어요?”

   “오노씨도 같은 생각인지 확인하기 전엔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전 사쿠라이씨를 처음 본 그 날부터 이미 흔들렸는 걸요.”

   “그런 거치곤 굉장히 잘 숨기셨네요. 전혀 몰랐으니.”

 

   그 말에 오노는 스스로를 몇 대 때렸다. 바보, 멍청이 하는 말이 머릿속에 울려퍼졌다. 그렇게나 잘 숨겼단 말인가, 하고 얼굴을 찡그리며 읊조렸다.

 

   “저도 지금 보니 괜히 숨겼다 싶네요. 그래서, 좋아한단 말은 언제 해줄건데요?”

 

   사쿠라이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지금 당장 할게요. 좋아해요. 정말. 아주 많이”

   “오늘 하루만 더 깊은 밤을 함께해도 되겠죠? 그리고 그 하루가 이틀이 되고 사흘이 되어도, 괜찮겠죠, 오노씨?”

 

   입이 다물어지질 않는 오노였다. 지금 듣고있는 음성이 환청인지, 대사가 꿈에 나오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황홀했다. 그가 서슴없이 뱉은 하루 이틀 사흘의 밤이 벌써부터 기대되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는 말도 참 아름답게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자 도르륵 굴러가는 눈동자를 멈춰세울 수 없었다. 싱그럽게 웃던 얼굴이 눈앞에 박제되어 사라지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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