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eyond color
공삼
밤비가 저의 메이트를 처음 만난 날. 그는 우습게도 저의 메이트를 만났다는 사실을 바로 인지하지 못했다. 그 날은 당장 아가미가 돋아도 이상하지 않을 만치 묵묵하니 처지는, 비가 쉼 없이 쏟아지던 날이었다. 그 습윤한 공기 중에서 그 남자는 당장에라도 녹아내릴 것처럼 빗속에서 처연히 서 있었다.
흑백배경 중에서 홀로 툭 튀어나온 것을 본다면 이와 같을까? 숨 막히도록 짙은 푸르름 속에서 혼자 독특한 빛을 발하던 그의 메이트는 장례식장에 다녀온 사람처럼 온몸에 두른 것이라고는 색 없는 것들뿐인 체로 세찬 빗속에 서서 홀로 울고 있었고. 밤비는 혹여나 그 푸름에 진창 빠질까 두려워 허공에서 허우적대기라도 하는 양 아무런 의미도 없이 입술만을 벙싯대다 어느 순간, 그 남자를 기준점으로 물안개 퍼지듯 범람하는 색색의 홍수의 찬란함에 밤비는 기어코 깨닫고야 말았다. 아,
내가 지금 사랑에 빠졌구나.
***
자신들을 '컬러Color' 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자신들의 조상이 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다른 인종이라 주장하지만, 그에 관한 연구가 이뤄진 적은 지금까진 없다. 이 '컬러'들은 자신들의 존재는 19세기 이전부터 꾸준히 알려왔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자신들의 존재감을 알려왔던 기간이 긴 것과는 별개로 이들을 대상으로 한 생물학적 연구가 이뤄진 적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기 때문인지 이 컬러들 사이에서도 자신의 존재 규명에 대한 의견은 분분한데, 다른 인종이라는 의견 외에 다른 유력한 주장은 이 컬러라는 것이 사실 인종이나 진화론적인 문제가 아닌 단순히 하나의 질병이라는 것이다. 그저 특수한 경로를 통해 감염, 전염된 것에 불과하며 그 결과 이러한 증상이 나타나게 되었을 뿐이라고, 그러나 이 두 주장 역시 인류학 학계 내에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데, 왜냐하면 이 '컬러'라는 인종 또는 증상은 결국 생각 이상증, 즉 색맹과 별다른 점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 해서 그들의 커뮤니티 안에서 컬러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일반 사회에 명확하게 알려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의견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 '컬러' 들의 주장으로는, 컬러가 컬러로 온전히 자각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소울메이트를 만났을 경우뿐이기 때문이다. 컬러끼리 만나는 과정에서 어떠한 화학적 메커니즘이 일어나 컬러로서 자각하게 되고, 광수용기가 반응하여 색을 보게 되거나 보지 못하게 되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컬러들은 자신의 메이트를 만나지만 않는다면 자신이 컬러인 줄 모르고 평생을 사는 것도 이론적으론 가능하다.
그래서 일까? 컬러들은 자신의 메이트를 지칭할 때 소울메이트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한다고.
***
나루세상 안녕하세요?! 오늘은 뭔가 세상이 좀 더 컬러풀 해졌다던가 제가 오기 전에 색 분간이 어려웠다던가? 그런 적 없으세요?
안녕하세요. 아니요. 그런 적 없습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나루세 료는 색맹이었다. 밤비는 그럴 리 없다고 주장했지만, 여하튼 나루세의 말에 의하면 '나루세 료'는 색맹이었다. 오늘은 밤비가 나루세의 사무실로 무턱대고 처들어오기 시작한 지 대략 두 달쯤이었고 비가 억수같이 퍼붓던 어느 날 처음 만나게 된 그 어린 청년은 자신이 나루세의 소울메이트 이며 나루세 역시 저처럼 컬러라 주장하기 시작한 것 역시 두 달쯤이 넘어가고 있는 시점이었다.
날개 없는 천사로 유명한 나루세 료 변호사 사무실의 사무원들은 처음 밤비가 나루세의 사무실에 들락날락하기 시작했을 때 어딘가 양아틱해 보이는 생김새와 옷차림에 혹여 어떤 불량한 것을 목적으로 드나드는 것이 아닐까 하여 매우 긴장했고 또 걱정했지만, 그가 출입하기 시작한 지 대충 일주일이 넘어갔을 무렵부터는 모든 경계심을 풀고는 도리어 웃으며 그를 대하기 시작했다.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그들은 웃으며 대하다 못해 친절하게 굴며 친한 적 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는데 특히 밤비가 사무실에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시작되는, 정해진 수순처럼 이어지는 질문공세와 이에 질세라 이어지는 나루세의 칼 같은 거절까지의 모든 과정이 끝나고 나면 소파 팔걸이나 옷걸이나 가끔은 책상 어떨 땐 소파 위에 엎드려 흑흑흑하고 거짓 울음소리를 내며 찌그러져 있는 것에게 손님을 위해 마련해 둔 간식까지 내어주며 그를 달래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모든 걸 늘 지켜보고만 있는 나루세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어린 청년에게 유독 무르게 구는 제 사무원들에게 어떤 제지나 혹은 질책을 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 변호사는 그저 늘 그랬듯이 밤비가 아삭아삭 소리를 내며 울고 있는 걸 달래는 그의 사무원들을 무심한 듯 상냥한 눈으로 흘긋 살피고는 저의 사무실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면 그제야 그의 사무원들은 밤비에게 울지 말라는 것이 아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저희는 후토시군의 말을 믿는다며 만약에 나루세가 정말 싫었거나 거절을 할 요량이었다면 경비원을 불러 내쫓아냈을 것이라는 격려 아닌 격려를 하며 그를 위로해주었다.
그리고 오늘 역시 근 두 달간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날이었다. 나루세가 밤비를 향해 거절의 말을 하고 바로 사무실로 들어가 버리지 않았다는 점만을 제외하면. 받을 것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용건이 있어서인지 나루세는 아주 잠깐이지만 평소보다 조금 더 오래 머무르고 있었고 밤비는 평소처럼 냉담한 나루세의 거절에 상처라도 입은 양 옷걸이를 부여잡고 흑흑대다 비 맞고 있는 개새끼처럼 처량 맞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오늘도 야멸차시네요...
글쎄요. 그런가요?
돌아오리라 생각 못 했던 말에 대답이 돌아오자 놀란 밤비는 눈을 크게 떴다가 되돌아온 말이 또 한 번의 거절이라는 데서 그 눈동자는 잠시간 흐려지는 듯했다. 하지만 밤비는 눈꺼풀을 깜빡이는 것으로 의지를 새롭게 다질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두세 번 깜빡이더니 곧 또렷해진 시선으로 나루세를 향해 또박또박 "그래도 괜찮아요."라고 말했다. 전 알 수 있으니까요,
당신이 제 소울메이트 라는 사실을요.
그러고는 눈매가 휘어져라 환히 웃었는데 그 웃음을 본 나루세는 그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웃지도 짜증을 내지도 하다못해 화를 내지도 않고서, 그저 냉담한 표정으로 돌아서선 그의 사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하지만 그의 덤덤한 표정이 무색하게 그의 발걸음은 떨리는 듯하였으며 그의 양 귓가는 벌게져 있는 듯했다. 그리고 밤비는 그 모든 것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나루세가 사무실을 온전히 빠져나가고 그 맛은 편의 문 마저 닫히는 소리가 나고서야 간신히 참았던 긴장과 한숨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 안에서 긴장하고 있었던 사람이 과연 밤비뿐이었을까?
밤비가 처량하게 돌아가고 나서 나루세는 서류를 깜빡 두고 갔다며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고 그에 사무원들은 변호사님답지 않으시네요. 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평소 꼼꼼하던 나루세답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나루세는 밀려드는 어지럼증에 눈가를 찌푸리며 하하하.. 하고 바람 빠진 풍선인형 같은 소리를 내었다.
밤비가 사무실을 다녀가기만 하면, 그가 있었던 자리에는 색색의 입자들이 잔상처럼 허공에서 둥실둥실 떠다니며 흑백뿐이던 나루세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그리고 그건 곧 어지럼증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나루세는 밤비가 왔다 가기만 하면, 한동안 제 사무실에 틀어박혀 눈을 감고 어지럼증이 가라앉길 기다렸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짬조차 나지 않을 만큼 바쁜 날이었고 몇 날 며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상태였으며, 척척하고 우울한 날씨에 그의 신경은 날카롭게 곤두서있었으나 다른 이들의 괜한 걱정을 사고 싶지 않아 최대한 아무렇지 않을 척하고 있었다. "변호사님 거기 하늘색 파일 좀 꺼내주실래요?" 그리고 그것은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네, 여기요."
...변호사님? 이게 하늘색인지는 어떻게 아셨어요?
색맹이시잖아요...? 당황함에 손에서 놓아버린 서류철에서 와르르 쏟아져 나온 종이들에 둘러싸인 나루세는 순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눈 하나 깜빡이지 못하고 숨을 쉬는 것마저도 잊은 체 그 모양 그대로 한참을, 침묵 속에 서 있다 그의 손에 달라붙어 있는 것 같은 색입자를 털어내었다. 그렇게 하면 다시 색이 없어지기라도 할 것 같은 태도였다. 그는 눈을 한 번 깜빡이고 손을 두 어번 떠는 것에 색입자가 모조리 흩어져 익숙한 세상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당장에라도 꺼질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제발 후토시군에겐 비밀로 해주세요."라고 속삭였다.
어째서요? 후토시군이 변호사님의 소울메이트인 거잖아요.
사무원이 안타까운 것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꺼낸 말에 나루세는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애써 미소 지었다. 시체빛이라는 단어가 이러한 안색에서 나온 것인가 싶을 정도로 창백하고 메마른 얼굴이었다. 아니에요..
만약 다음에 또 후토시군이 온다면, 애써 사무적으로 말하려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류철을 매만지는 손가락은 무참히도 떨렸다.
그땐 더이상 사무실에 오지 말아 달라고 전해주시겠어요..? 만약 다시 오게 된다면, 의뢰인으로서만 와달라고요.
이제 그만 꿈에서 깨어나야 할 시간인 듯했다.
***
"저녁노을이 아름답다고 느낀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에요..."
그 말에 나루세는 형용하기 어려운 기분에 휩싸였다. 왜냐하면 그 역시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루세의 상담실은 저녁때쯤이면, 흡사 온 방이 터져나갈 것처럼 노을이 가득 들어차는 방이었다. 그리고 나루세가 그것을 알게 된 것은 우습게도 오늘에서의 일이다.
두고 간 물건이 있다는 연락을 받아 혹시 남이 보아선 안되는 물건이었을까 하는 마음에 사무실에 들린 거였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오지 말걸 그랬다는 뒤늦은 후회가 책상 위에 땅거미처럼 길게 늘어저 꼭 그림자 지는 것이 보였다.
이주일만에 재회였다.
처음에 전해주신 말을 들었을 땐 다음에 나루세상을 만나려면 제가 경찰서에라도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친구들이랑 이야기해봐야겠다는 생각도요. 어느 정도의 범죄를 저질러야 당신을 변호사로 선임할 수 있을지나 선임료는 어디까지 준비해둬야 좋을까? 라는 생각까지 했었는데.. 밤비는 잠시간 해가 다 저물어가는 유리창이나 바람에 팔랑이는 머리칼이나 궁지에 몰려 주춤거리는 이의 시선이나 초조하게 서류철 따위를 움켜쥐기를 반복하는 자작나무가지처럼 바싹 마른 손가락 같은 것에 시선을 두었다가 방구석 어느 틈에서 인지 모를 누군가의 긴장으로 곤두선 불안하기 짝이 없는 숨소리 따위를 들으며 입술을 어물대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네요.
"그동안 왜 모르는 척 하셨어요?"
직원분께 다 들었어요.
모르는 척이라니 자신이 그동안 밤비에게 퍼부었던 냉대를 생각하면 지나치게 무른 단어였으나 그는 저가 받았던 부당한 대우를 그렇게 표현했다. 당신은 나에게 어찌나 무르고, 또 조심스럽고 소중하게 다뤄주는지. 나루세는 이 어린 청년의 다정함에 기대어 이기적으로 굴어왔던 자신이 역겨워 당장에라도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더이상 외면마저도 할 수 없게 된 나루세는 그의 메이트로부터 추궁 아닌 추궁을 당하는 와중에도 어찌해야 이 청년이 저를 포기 할까? 라고 생각했다. 컬러니 운명이니 하는 것에 얽매이지 않고서, 그저 저의 사랑을 받아 마땅한 다른 사랑스러운 존재를 찾아낼 수 있을까 하고.
결코 사랑 받아선 안되는 것에게 부어지는 사랑이나 믿음들은 얼마나 잔인하고 고된 것인지. 하지만 소울메이트라는 것은 그가 내친다고 해서 내치는 것이 아니었고 그가 사랑하지 않겠다 마음먹는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니었기에...
수많은 고독과 외로움의 나날들 속에서 어떤 운명의 장난이나 혜성처럼 갑자기 등장한 그의 메이트는 단순히 나타난 것만으로도 나루세의 가슴에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그 생채기는 나루세의 인생이 얼마나 덧없이 흘렀는지를 나타내는 지표였고, 그렇기에 더욱 그의 사려 깊은 행동 하나하나가 시리고 아려왔다.
하지만 그는, 나루세는, 마나카 토모오의 메이트를 받아들이지도 내치지도 않았다. 정확히는 그러지 못했다. 마나카 토모오에게 간신히 하나 남았던 것마저 그의 손으로 내던져버리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게 잔혹한 처사였기 때문이다. 나루세는 토모오의 모든 것을 강탈한 주제에 그의 소울메이트 만큼은 그에게 남겨 줄 만큼의 자비심은 남아있는 것처럼 굴고 있었고 동시에 그 행동 자체가 터무니없는 욕심이었음을, 그도 분명 알고 있었다.
제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면 먼 발치에서 나마 볼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아주 작은 욕망.
나루세는 그 날 이래 단 한 번 부려본 욕심에 발목 잡혀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결단을 내리지도 못한 체 그대로 잠식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감히 나루세가 그의 메이트를 만나 행복하게 살 수가 있을까?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망가진 하모니카나 시체뿐이고 그 모든 것을 내팽개쳐버리고 안식이나 평온을 누리기엔 이미 너무나 먼 길을 걸어왔는데.
노을은 여전히 땅바닥 그 끝자락에 걸린 채로 넘어갈 듯 넘어가지 않을 듯 다 죽어가는 숨을 꼴딱꼴딱 뱉어내고 있었고 그 마지막 남은 햇빛이 마치 나루세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양 그의 턱에 매달려 어룽져있다 목울대를 가만히 쓰다듬고는 기어코 스러져버렸다. 그에 나루세는 없는 용기를 내어 부인하는 말이나 그를 거절하는 말을 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의 입 밖으로 나오기 위해 혀끝에서 투닥대는 것은 그 어떤 한탄이나, 한숨이나 혹은 승복뿐이었고 나루세는 그 모든 것이 제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말을 꼴깍꼴깍 삼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재촉조차 하지 않고 그의 대답을 기다려주는 다정한 시선을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피해버린 나루세는 이대로 입을 다물어버리고 그를 받아들이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렸다. 나루세 라고 해서 그가 탐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밤비가 처음 그에게로 다가와 우산을 씌워주던 그 순간, 나루세에게 저가 당신의 소울메이트 인 것 같다며 수줍게 웃었을 때 어쩌면 나루세는 친절과 웃음을 가장하고 나루세 료 로서 그의 소울메이트인 양 평생을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 그의 누이에게 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모든 비밀을 그에게 털어놓고 싶다는 충동이 그 뒤를 따라왔다. 분명 제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은 저가 겹겹이 둘러왔던 베일을 한자락이라도 들춘다면 전부 다른 사람의 될 것이 분명했다. 붉게 물든 채로 조잘대었던 목소리나 눈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음 지어주었던 시선 따스하다 못해 뜨거웠던 체온까지, 전부.
하지만 어찌 말할 수가 있었을까? 당신의 짝은 나루세 료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며 그는 이미 수년 전에 자신의 손에 죽임당해 땅 아래 묻혔으며 그 아래 묻힌 것이라고는 이름까지 빼앗은, 시체조차 남지 않은 빈 관 일뿐이라고
그가 하고 싶은 말과 해야만 하는 말들이 흡사 제 손으로 귀를 잘라내었던 어느 날의 불행한 화가의 그림처럼, 달빛과 별빛, 밤하늘과 사이프러스 잎사귀들이 맴돌듯이 빙글빙글 뒤섞여 수면 위에 떠오른 별빛처럼 차갑고 푸르게 빛났다.
"그러니까..."
나루세는 잠시 숨을 고르다 탁자에 놓여있던 쏟아버렸다. 컵 안에서 쏟아져 나온 음료는 느리게 빠르게 탁자를 어루만지고 바닥으로 천천히 흘렀다. 끝을 향해 달려가는 그 투명하고 끈적한 액체가 꼭 저를 보는 것 같았다. 엇, 하고 들려온 숨소리에 나루세는 단호하게 가만히 두세요. 라 말하고 재판장 앞에 섰을 때의 마음가짐을 상기시켰다.
"그러니까,"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이거에요.
전 저희의 만남이 이 컵의 음료가 쏟아진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해요. 컬러들은 불특정 다수 중에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정해진 특정한 사람을 만나 컬러가 되고 그와 소울메이트로 정해지죠. 어떠한 유전적인 법칙이나 과학적 근거에 기반을 두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피부표면을 스쳤다거나 혹은 아주 근거리에 접근했다거나 하는 말도 안 되는 이유만으로 말이에요. 소울메이트로 한번 정해지고 혹여 각인이라도 하게 된다면 그 사람 없이는 색이 있는 세계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되고 심하면 시력을 잃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죠. 후토시 군은 이러한 것들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으세요?
한번 입을 떼기 시작하니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거짓말들이 컵 안에 들어있던 음료수 마냥 주륵주륵 흘러나왔다. 구둣발 아래를 끈적하게 적시는 음료가 기꺼웠고 그는 스스로 내뱉는 잔인하기 짝이 없는 말들에 어째서인지 몹시 안도 하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줄줄줄 쉼 없이 쏟아지는 냉혹하고 생채기뿐인 차가운 단어나 문장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듣는 이보단 말하는 이를 옭아매고 상처입혔다.
우리의 만남은 어디까지나 우연의 일치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당신도 알고 계시잖아요... 그냥 그냥, 질 나쁜 장난이었다고 생각하세요. 어쩌다 흙탕물웅덩이를 밟거나 눈앞에서 타야 할 버스를 놓쳐버렸다거나, 컵에서 쏟아진 음료수에 바지 밑단을 적신 정도의 소소한 불행이었다고요. 저희의 만남은 불행한 해프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루세는 떨려오는 손을 다잡으려 애쓰고, 바싹 말라오는 입안의 침을 그러모아 삼킨 다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거짓말을 하기 위해 천천히 입을 떼었다.
이 딱딱하고 차갑기 그지없는 의미 없는 거짓말들로 인해 밤비가 상처 입고 돌아선다면 그는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밤비가 남긴 사랑스러웠던 문장과 행동 온기들은 그에게선 마모되어 사라진다 해도 적어도 나루세에게는 앞으로 그가 걸어가야 하는 어둠뿐인 터널 속에서 단 한 줄기의 빛이 되어줄 것이 분명해 보였으므로
그리고 밤비는 떨고 있는 나루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니 저희가 만났던 일은 없었던 일로 해요.
"싫어요."
바람 한 점 들어오지 못하게, 사방을 닫아둔 건물 안에서 어디서 들어왔는지 모를 거센 바람이 그의 온몸을 헤집고 지나간 것처럼 느껴졌다. 나루세의 착각임이 분명한데도 이상하게도 그렇게 느껴졌고 나루세는 차마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하나의 예감에 휩싸였다.
내가 컬러인 것이나 당신이 내 메이트인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비록 제가 당신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겨우 얼굴이나 이름 정도지만 자꾸 생각나고 보고 싶고 걱정 되는 걸요. 밤비가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가 호수 위에 던져지는 돌멩이처럼 호수 표면에 파문을 일으켰다. 잔잔히 흔들리는 수면에 창 밖에서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한 길거리 가로등의 불빛들이 반사되어 쉼 없이 반짝거렸고 나루세는 그 파문 아래 기대어 한없이 흔들리고만 싶어졌다..
힘들진 않은지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잠은, 잘 자고 있는지 웃고 있는지, 혹시나 울고 있지는 않은지...
나루세는 밤비 덕분에 사람의 눈에 너무나 많은 감정이 고이면 그 눈동자의 표면이 마치 어떤 달이나, 별이나, 혜성 같은 것처럼 찬란히 빛이 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밤비가 한 점 흔들림 없는 곧은 시선으로 눈을 한번, 두 번, 세 번. 깜빡일 때마다 그 유리알같이 투명한 것에 고여있던 감정들이 하염없이 반짝이며 허공으로 뚝뚝뚝 떨어졌다.
그 투명하리만치 찬란하게 빛나는 시선이 상처 입고 경계하는 짐승에게 다가가듯, 섬세하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나루세에게 다가가자, 나루세는 더이상 저에게로 가까이 오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떠올랐으나 그것은 곧 수면의 흔들림에 의해 맥없이 어디론가로 사라져버렸다.
왜 그런 말로 저를 밀어내려 하시는지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언젠가 제가 알게 되는 날이 올까요?) 그리고 정말로 저희의 만남이 불행한 사고로 만났다고 해도, 그 사고 인해 만난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인가요? 나루세상 말대로 정말로 우리의 만남이 단순한 해프닝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이미 저희는 만났고, 난 당신에게 어떤 운명 같은 것을 느껴버렸는걸요.
게다가 사람은, 사람이라는 것은, 언제나 불특정 다수의 인간 중 어떤 특정한 사람을 만나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되지 않나요? 그 사람이 악한 사람인지 범죄자인지 혹은 선한 사람인지 미련한 사람인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에요. 그 불확실성 속에서 기어코 다른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고 마는 것이 사람이 아니던가요. 그것이 사람이건 컬러이던 간에...
시야에 색색깔깔 현란하게 들어차기 시작한 색의 입자에 현기증이라도 날 것처럼 아득해져 옴을 느꼈다. 그곳이 본래 자신의 자리라 주장 하는 양 천천히 맞닿은 코나 뺨이나 속눈썹이나 뜨거운 체온은 정말이지 눈물 나게 사랑스러웠다. 서로의 눈물은 뒤섞여 끝을 모르고 바닥으로 떨어지며 빛이 나는 듯했고, 어디선가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바위에 부딪혀 하얀포말이 성기는 소리.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 영혼이 부수어지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