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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프닝 

312

 

“안녕, 쇼.”

“……어?”

 

 

   두터운 안경알에 짓눌리던 콧대가 욱신거렸다. 습관처럼 안경을 고쳐쓴 뒤 전공 책을 덮어 가방에 넣던 사쿠라이는 별안간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디선가 좋은 냄새가 난다 했더니, 눈앞에 떡하니 서 있는 이 사람이 주인이었나보다. 언젠가 맡아본 것도 같은 섬유 유연제의 향이던가, 아님 엄마가 프랑스 여행에 다녀오며 사왔던 고급 바디워시의 향이었던가. 어찌 되었든 익숙한 향이었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향인데, 대체 왜 익숙한 건지.

   아무튼, 냄새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사쿠라이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정체가 낯설었을 뿐. 이렇게나 다정한 목소리로, 그것도 쇼, 라는 이름을 불러주는 건 대학에 온 이후로 처음이었다. 무거운 안경테보다도 낯선 목소리에 멍청한 소리만 내었고, 사쿠라이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애초부터 강의실에 자신의 이름이 불린 그 상황 자체가 익숙하지 않았으니까.

 

 

“어제는 고생 많았어.”

“……어제…?”

“응. 술도 잘 못 마시던데, 속은 괜찮아?”

 

 

   아, 어제. 사쿠라이는 그제서야 삐걱거리며 고개를 두어번 끄덕였다. 어제는 난생처음 동기들과 술자리를 가진 날이었다.

   뭐, 처음부터 술자리에 함께한 건 아니었다. 어제는 한 달에 한 번 있는 천문학 동아리의 회식 날이자, 100년에 한 번 볼 수 있는 유성우가 쏟아진다던 날이었다. 오전 강의가 끝난 사쿠라이는 들뜬 마음으로 가방 한 켠에 망원경과 카메라를 집어넣은 채 약속 장소로 나섰고, 하필이면 어제는, 몇몇 학과 동기들이 같은 장소에서 종강 기념 회식을 즐기기로 한 날이었다. 시간만 대충 떼우다 유성우가 가장 잘 보일만 한 건물 옥상으로 슬그머니 빠져나가려던 사쿠라이의 계획은 역시나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무엇보다 전 학부를 통틀어서 가장 존재감이 없는 자신을 알아챈 것부터가 놀라웠다.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사쿠라이!’ 하고 외쳤던 이가 누구였더라. 아마, 아이바 어쩌구하는 이름이었던 것 같다. 동아리 부원이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알아보지 못했을 과대표였다.

 

 

“뒤에 수업 있어?”

“없긴 한데…….”

“잘됐다. 그럼 같이 가자.”

“……어딜?”

 

 

   사쿠라이의 팔을 감싸 잡아 일으키는 손길이 자연스러웠다. 힘을 주어 잡은 팔을 은근히 쓸어내리는 이의 이름은,

 

 

“너희 집.”

 

 

   오노 사토시였다.

 

 

 

-

 

 

 

   오늘은 아침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허리가 뻐근했고, 숙취 덕분에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으며 늦잠마저 잔 탓에 지각까지 할 뻔했다. 아, 그렇다고 해서 빗질조차 하지 못한 머리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지는 못했다. 사쿠라이는 그저 그런 학생 중 하나일 뿐이니까. 그러니까, 오늘 아침 풍경을 한번 되새겨 보자는 이야기다. 침대는 깔끔한 성격에 어울리지 않게 마구 어지럽혀져 있었고, 잠옷으로 갈아 입으려다 실패한 건지 여름치고는 서늘하기까지 한 맨몸과 침대 밑에 널부러져 있는 옷가지들, 그리고 속옷들은 사쿠라이의 머리를 더욱 지끈거리게 만드는 데 충분했다. 다신 술 마시면 안되겠다……. 가만히 중얼거린 사쿠라이는 바닥에 내팽겨쳐져있는 안경을 주워들어 학교로 출발했다. 그게, 오늘 아침이었다.

 

 

“쇼, 여기 아냐?”

“아, 으응, 맞아.”

 

 

   자취를 시작한 지 벌써 이 년이 다 되어갔다. 이 년이라는 시간 동안 사쿠라이의 자취방은 온전히 사쿠라이만의 것이었다. 그 말인즉슨, 지금껏 이 방에 들어온 사람이라고는 방 주인인 사쿠라이 뿐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혼자가 아닌 현관이 낯설지 않은 거지?

정신을 놓고 걷던 사쿠라이를 붙잡아 준 건 다름아닌 오노였다. 겨우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옅은 라벤더 향이 두 사람을 반겼다. 몇 년씩이나 놔뒀던 라벤더 디퓨저인데, 오늘은 왜 이렇게 낯선 건지. 비밀번호를 누르는 순간까지도 사쿠라이는 고민했다. 이 문을 열고 타인을 들이는 게 맞는 건지, 지금이라도 돌려보내야 하는 건지. 사쿠라이는 쭈뼛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꼭 주인과 손님이 뒤바뀐 기분이었다.

 

 

“으응, 네 침대 엄청 편하다-.”

 

 

   어제도 느낀 건데…….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털썩 눕는 오노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킨 사쿠라이는 도망치듯 화장실로 들어갔다. 침대가 편하다고 이야기한 뒤, 무어라 더 얘기한 것도 같았지만, 그런 사사로운 이야기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는 사쿠라이였다. 차가운 물에 세수까지 하고서는 거울 속 자신을 들여다봤다. 지금 우리 집에 오노 사토시가 있다. 인기도 많고 연애도 수없이 해봤(다고 알고 있)으며, 당장 전여친, 전남친만 해도 무용과 과탑에, 방송과 마츠모토라는 어마어마한 이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 이뿐이라면 사쿠라이가 이렇게 애가 탈 이유도 없다. 찬물에 머리카락을 다 적셔가며 온몸에 오르는 열을 내리려 고생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사쿠라이는 오노 사토시를 좋아하고 있었다. 대학 입학 후 새내기 환영식이라며 만들어진 자리에서 처음 마주친 오노는 사쿠라이의 완벽한 이상형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기분에 사쿠라이는 어찌할 바를 몰랐었고, 그런 사쿠라이에게, 오노가 요만큼의 관심조차 줄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2년이었다. 이름조차 모르는 사이로 지낸 게. 같은 학과인 주제에, 팀플이 그렇게나 넘쳐나는 전공 수업이 한가득이면서 오노와 사쿠라이는 같은 조마저 된 적이 없었다. 늘 옆에서 바라만 보던, 사쿠라이에게 있어서는 밤하늘에 떠 있는 별보다도 가까이 가기 힘든 존재였다.

   그런데, 대체 왜,

 

 

“쇼오, 안 나오면 나 이대로 자버린다!”

 

 

   상상 속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목소리로, 야살스레 저의 이름을 부르는 오노가 집에 들어와 있는 건지. 사쿠라이는 아직도 현실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미, 미안…….”

“미안하면 얼른 와서 앉아.”

 

 

   어느새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꺼낸 오노가 옆자리를 팡팡 치며 사쿠라이를 불렀다. 엉거주춤 다가간 사쿠라이는 최대한 의자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자리에 앉았다. 오노에게서 나는 저 의미 모를 향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물론, 그런 행동들이 오노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의자가 불편한 건지, 아님 몸에 이상이라도 생긴 건지, 자꾸만 멀리 떨어지려는 사쿠라이의 모습에 겨우 웃음을 참은 오노는 그대로 사쿠라이의 팔을 잡아당겼다. 어깨가 딱 붙을 정도로 나란히 앉은 자세에 만족한 건지, 오노는 살풋 웃으며 사쿠라이의 얼굴을 살폈다.

 

 

“……이러다 기절하겠네.”

“……어, 어?”

“아냐. 과제 시작하자.”

 

 

   아, 맞다. 과제.

   오노가 사쿠라이를 끌고 사쿠라이의 집에 데리고 온 건(?) 과제 덕분이었다. 오노는 2인 1조로 이루어진 이번 과제를 사쿠라이와 함께 하게 되었다며, 마감 기한이 촉박하니 사쿠라이의 자취방으로 가서 함께 끝내버리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불편하다면 거절해도 된다고 했지만, 감히 오노의 말을 거절할 수 있는 사쿠라이는 이 세상에 없었다. 울며 겨자먹기로 고개를 끄덕인 사쿠라이에, 오노는 어딘가 들뜬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었다.

   예상외로 과제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서로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며 자료를 만드는 데에 몰두했고, 옆에 앉은 오노를 심히 의식하던 사쿠라이도 어느샌가 과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저녁도 건너뛴 채로 발표 자료를 만들던 오노가 조금 지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쉬었다 하자!”

 

 

   기지개를 켜며 의자에서 일어선 오노가 다시 한번 침대에 풀썩 누웠다. 살짝 올라간 셔츠 덕에 속살이 보이려 했다. 하지만, 하필이면 그걸 사쿠라이가 봤다는 게 문제였으려나. 사쿠라이는 애써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하며 다른 생각을 해보려 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다시, 머릿 속은 온통 오노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누우니까 더 졸리네…….”

“…….”

“세수라도 해야겠다. 나 화장실 좀 써도 되지?”

“……으응.”

 

 

  오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한숨을 길게 내쉰 사쿠라이가 고개를 툭 떨궜다. 세면대 수도꼭지가 열리고, 쏴아 하며 쏟아져 내리는 수돗물 소리가 듣는 것만으로도 시원하게 느껴졌다. 겨우 정신을 진정시킨 사쿠라이는 문득, 졸리다는 오노의 말이 생각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 끝에 걸터 앉은 뒤 콘솔 아래 서랍에 손을 가져다 댔다. 분명 여기에 졸음 방지 껌을 넣어둔 기억이 있다. 그 껌을 산 날도, 아마 새벽에 떨어지는 별을 보기 위해 사놓았을 터였다. 그리고, 무언가 이것저것 들어 있는 서랍을 뒤적이던 사쿠라이의 손이 일순 멈췄다. 이게, 왜……. 정사각형 상자에 낯뜨거운 단어가 적혀있는 걸 보니 분명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물건임에 분명했다. 근데, 대체, 이게 왜 내 서랍에…….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상황에 사쿠라이는 손바닥 위에 올려진 상자를 이리저리 돌려봤다. 아마 평생 사용할 일도 없고, 살 일도 없을 거라며 단언하던 물건 중 하나였다. 연애, 사랑, 뭐 그런 것과는 동떨어지는 삶을 사는 사쿠라이였으니까. 그런 사쿠라이의 자취방에, 그것도 침대 옆 서랍에, 심지어 절반 이상은 이미 사라진 채로. 설마 하는 마음에 침대 옆 휴지통을 살펴본 사쿠라이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언뜻 봐도 대여섯개는 되어 보이는 포장지가 무참히 뜯겨진 채 쌓여있었다.

 

 

“뭐해?”

 

 

   그와 동시에,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화장실 문이 열렸다. 앞머리가 살짝 젖은 채로 나온 오노가 침대에 앉아있는 사쿠라이를 향해 물었다. 사쿠라이는 그대로 굳어버린 몸으로 어찌할 바를 몰라하고 있었고, 오노는 그런 사쿠라이를 향해 한발자국씩, 다가오고 있었다.

 

 

“벌레라도 나왔어?”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뭔데? 손에는 뭘 쥐고 있는,”

 

 

   순식간에 사쿠라이의 손에 쥐어져있던 것을 뺏어낸 오노가 눈을 깜빡였다.

 

 

“하나, 둘, 셋, 네엣…….”

“…….”

“와, 여섯 개나 썼네.”

“아, 아니야……!”

 

 

   그리고는 태연하게 남은 숫자를 센 오노가 뭐가 그리 웃긴지 으하하, 하고 웃음까지 터뜨리며 이야기했다. “뭐가 아닌데?” 장난스레 묻는 오노의 말에 사쿠라이는 입을 다물었다. 그 옆에 떨어져있던 영수증에 찍힌 구매날짜는 어제였다. 사쿠라이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어젯밤. 혹시라도 엄한 사람을 데려온 건 아닐까, 이게 정말 내가 쓴 물건이 맞을까. 사쿠라이는 믿기지 않는 사실에 입술을 깨물다, 결국 택한 건 볼품없는 질문이었다.

 

 

“……그, 저기, 있잖아.”

“응.”

“어제, 우리 만났을 때…….”

“응. 어제.”

“……혹시 내가 누구 데리고 집으로 가는 거 본 적 있어?”

“그럼, 당연히 봤지.”

“…….”

“이거 쓰는 것도 봤는데?”

 

 

   손에 든 상자를 흔들며 이야기하는 모습이 야했다. 이 말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사쿠라이는 화륵 열이 올라오는 얼굴을 아래로 툭 떨어트리며 입 안쪽을 세게 깨물었다. 누구지, 누구였을까. 그게 누구든 이건 완벽한 해프닝이다. 자책과 자위를 반복하던 사쿠라이가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그리고,

 

 

“왜냐면,”

“…….”

“그거 나였거든.”

 

 

   사쿠라이의 옆에 붙어 앉은 오노가 나지막히 얘기했다. 완벽한 비문이었다.

아래를 향하던 고개를 슬며시 들어낸 사쿠라이가 천천히 오노를 쳐다봤다. 여전히 생글 웃으며 사쿠라이를 마주하는 눈동자가 티없이 맑았다. 손에 든 콘돔 상자와 아주 잘 어울리는 눈이었다. 침만 꼴딱 삼키며, 여전히 현실을 믿지 못한 채 눈을 끔뻑이는 사쿠라이의 손을, 오노가 덥석 잡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사쿠라이를 침대 위로 눕히며 안경을 벗겨냈다. 두터운 안경에 짓눌려있던 콧대가 발갛게 부어있었다.

 

 

“나 아직 허리 아파.”

“…….”

“저거, 여섯 개, 너랑 나랑 쓴 거니까.”

 

 

   오똑한 콧대를 쓸어 내리던 오노가 말을 이었다. 아직 아프다면서, 여유로워 보이는 오노가 얄미운 사쿠라이는 심장이 터지려 하고 있었다. 마구 뛰어대는 심장 고동에 귓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오노의 손길에 이미 다 풀어 헤쳐진 셔츠 사이로 찬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그대로 몸을 숙여 얼굴을 가까이 한 오노 덕분에 두 사람의 간격은 5cm도 채 되지 않았고, 사쿠라이는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숨을 들이쉬었다. 꿈에서도 본 적이 없는 장면이다. 이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해? 이성과 본능 사이, 갈 곳을 잃어 헤매이던 사쿠라이의 두 손은,

 

 

“어제 못 본 별, 다시 보게 해줄게.”

 

 

   그대로 오노의 허리를 휘감아 끌어당겨 입술을 맞부딪혔다. 사쿠라이가 몸을 돌리자 오노의 등이 침대에 닿았고, 오노는 그 순간마저도 떨어지기 싫다는 듯 목에 매달렸다. 사쿠라이는 그런 오노를 달래며 고개를 틀어 더 깊게 입을 맞췄고, 외설스런 소리를 내며 뒤섞이는 두 사람의 모습은 어딘가 익숙했다. 오노의 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허리를 살살 쓸어내리자 앙탈이라도 부리는 듯 몸을 비틀었다. 입술부터 턱선, 목, 그리고 쇄골까지 입을 맞추며 오노의 달디 단 몸에 붉은 자욱을 남겼다. 기억나지 않는 어제의 장면이 다시 반복되고 있었다.

    침대 한 켠, 어젯밤 놓쳤던 유성우가 끝을 모르고 쏟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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