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번째 프로포즈
등산 마스터
"그러고 보니 쇼 쨩, 오늘은 무슨 일로 빼고 왔어?"
"응?"
마치 비밀스러운 이야기라도 하듯, 짐짓 심각한 얼굴로 바라보며 소곤거리는 제 동료 아이바의 목소리에 사쿠라이는 서류를 정리하던 손을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빼고 왔다니, 무엇을? 어제, 아니,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일 텐데 자신의 모습에서 무엇이 그렇게 달라졌다고 하는 것인지. 다른 이의 의중을 읽어내는 것이 능숙한 사쿠라이 였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저를 향한 걱정의 목소리를 이해할 수 없어 그저 영문도 모른 채 멍하니 아이바의 잘빠진 얼굴만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서로 할 일도 내팽개치고는 노려보기만 하는 것이 얼마나 계속되었을까. 지금 이 상황이 눈싸움을 위한 시간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 하고 싶은지, 아니면 제 기다림에 한계를 느낀 것인지. 어느 쪽이든 먼저 입을 땐 것은 아이바 쪽이었다.
"싸우기라도 했어?"
"내가 누구랑?"
"그거 빼고 올 정도면 그런 수준인가, 싶어서."
하긴, 쇼 쨩이랑 오 쨩이 싸우는 건 상상하기 힘들긴 하지만.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리곤 무엇을 납득 한 것인지, 다시 할 일을 하려는 아이바의 어깨를 사쿠라이는 덥석 붙잡았다. 까, 깜짝이야. 갑자기 붙잡힌 탓에 들고 가려던 서류철을 그대로 떨어트릴 뻔한 아이바는 간신히 그것이 바닥에 부닥치기 전에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어쩐지 무서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듯 한 사쿠라이 때문에 자신이 무언가 하면 안될 말이라도 한 것인가 싶어, 아이바는 떠나지 못한 채 다시 사쿠라이의 곁으로 슬그머니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부부싸움은 해본 적이 없으니까 물어봐 져도 도와줄 수 없는데. 부부 상담 센터라도 지금부터 찾아보아야 하나? 아이바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즈음, 사쿠라이가 다소 조급하게 소곤거렸다.
"내가 뭘 빼고 왔는데?"
"그러니까…"
"얼른 말해."
"아, 그런 건가 싶어서…. 쇼 쨩, 반지 안 끼고 왔잖아."
반지? 사쿠라이는 그제야 아이바에게서 시선을 내리고 황급하게 제 손을 바라보았다. 팔목에는 평소에도 잘 차고 다니던 시계가 있었지만, 제 손가락이 무언가 횅해 보이는 것은 기분탓일까. 그리고 그 순간, 사쿠라이는 제 목숨보다 중요한 무언가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도 소중해서 잘 때도 안 빼고 다니던 반지, 수줍게 서로에게 나누어 낀, 사랑의 맹세와도 같은 그 반지. 심플한 디자인의 그 은색 링은 어디로 갔는지, 지금 사쿠라이의 손가락에 남아있는 것은 하도 반지를 끼고다녀서 생긴 눌린 고리 자국 뿐이었다. 쇼 쨩? 확실하게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사쿠라이는 단숨에 제 사고가 정지되는 것을 느꼈다. 결혼반지가 없다고?
사쿠라이가 완전히 멈춰 선 것을 보고 되려 기겁한 것은 아이바였다. 무엇을 숨기리, 사쿠라이와 대학교 동창이었던 아이바는 그가 결혼식을 할 때 축사까지 하며 펑펑 울었던 장본인이었다. 쇼, 쨩, 행복흐야대… 눈물 콧물 쏙 빼며 그야말로 오열을 하던 아이바는 지금까지도 결혼식에 참석했던 사람들에게 화자가 될 정도였다. 그렇기에 사쿠라이에게 있어 그 반지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도 알고 있었고, 솔직히 가끔은 너무 자랑을 해서 좀 질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반지를 잃어버리라고 저주를 건 적은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었다. 결혼식장에서 반지를 나누어끼던 그 순간에도 평생 행복하라며 제일 크게 외쳐 어린애 마냥 감정에 복받쳐 울던 사쿠라이를 웃긴 그 아이바 마사키. 그는 지금 사쿠라이와 같은, 아니 조금은 덜한 수준으로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일부러 빼고 온 거 아니었어?"
사쿠라이의 반응을 확인하던 아이바가 조심스럽게 물은 그 한마디에 사쿠라이는 안 그래도 처진 어깨가 두배 이상은 쳐져 보였다. 아, 이거 일났네. 아이바는 빠르게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퇴근 시간은 넘겼고 오늘은 사무실에서 사쿠라이와 단 둘이 잔업.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앞으로 반지를 찾는 그 순간까지 사쿠라이는 정신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사쿠라이의 손에 들려있는 서류철과 시계를 번갈아보던 아이바가 결심한 것은, 제 친구를 구해주기 위한 동아줄을 던지는 것이었다.
"뭐, 뭐 하려고?!"
"쇼 쨩, 오늘 이거 정리 하면 끝이지?"
어차피 반지 잃어버린 거 걱정하느라 일 못하는 쇼 쨩 보다는 내가 하는 게 더 빨라. 방해밖에 안되니 얼른 집에나 가버리라며 등을 떠미는 아이바를 붙잡고 사쿠라이는 망설이고 있었다. 물론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회사고 잔업이고 다 내팽개치고 뛰쳐 나오고 싶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할 일은 해야 하는 게 사회인으로서 마땅한 도리였다. 하지만 반지가 없다는 사실을 안 이상 더이상 일은 할 수 없는 것이 사실었이고, 솔직히 아이바의 말이 백번 맞았다. 지금의 사쿠라이 쇼는 없는 것만도 못할 정도인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선 솔직하게 그의 호의에 감사를 하며 어떻게든 제 불안요인을 없애는 것이 먼저였다.
"미안, 진짜 미안!"
"괜찮아, 괜찮아!"
차근차근 잘 찾아봐, 알겠지? 살짝 무거운 것인지 서류를 바로 잡는 아이바는 지금의 사쿠라이에겐 하늘에서 내린 천사나 다름 없었다. 꼭, 다음에 밥 살 테니까. 허둥지둥하며 일단은 책상 주변을 이리저리 뒤져보던 사쿠라이는 문득 자신이 오늘 점심 즈음에 오노에게 보냈던 사진을 기억해내 황급히 제 메시지를 확인했다.
[오늘 카레였어. 형 이거 좋아하지?]
점심으로 나왔던 오노가 좋아하는 카레의 사진을 유심히 보니 사진 안에 찍힌 손에 반지는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여기 오기도 전부터 없었다는 건데. 사무실 안을 완전히 해체 시켜버릴 기세로 뒤집어보려던 사쿠라이는 어느 정도 반지의 행방을 좁힐 수 있다는것에 안심했다. 어제 보냈던 빵 사진에는 제대로 반지가 있는 것을 보아, 어제 점심 이후부터 오늘 점심 이전에 사라진 것이 분명했다. 오늘은 다른 회사와의 이야기 때문에 점심시간 이전에 카페에 들렀다가 바로 회사에 나왔으니, 우선은 그 카페부터 되돌아가 보는 것이 좋겠지. 마치 추리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 마냥 손가락을 비비던 사쿠라이는 결심을 하고 대충 재킷을 걸쳤다. 평소라면 단추도 잠그고 넥타이도 바로 하고, 어딜 가던 정갈하게 하고 다니겠지만 지금은 제 체면이고 이미지고 신경 쓸 시간이 아까웠다.
그런 꼴로 나갔다가는 지나가던 사람이 놀라겠다며, 책상 주변을 휘젓느라 한껏 엉망이 된 사쿠라이의 머리를 재빠르게 정리해준 아이바는 사쿠라이가 사무실에서 나가는 그 순간까지 그를 응원했다. 꼭 찾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저런 친구를 둔 것에 감사함을 느끼며, 사쿠라이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회사를 뛰쳐나왔다. 누가 보면 도망자 신세인 줄 알 정도로, 제 핸드폰에 방문했던 카페의 주소를 찍은 사쿠라이는 망설임도 없이 뛰었다. 제발, 카페에 있어라.
[영업시간 8:00 - 19:00]
그리고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사쿠라이는 만화에서나 나올법하게 바닥에 털썩 주저 앉을 수 밖에 없었다. 만약 피티아스가 다몬에게 이르지 못했다면 분명히 이 정도의 모습이었으리라. 그렇게 열심히 뛰었는데. 시계를 확인해보니 시간은 7시 21분. 불이 꺼진 카페 안을 아무리 바라보아도 정리된 의자들만이 즐비했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하지. 사쿠라이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동하면서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면 이곳에 있을 확률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서 걸음을 멈추기엔 사쿠라이는 더 찾아보아야 할 곳들이 있었다. 카페에 가기 전에 잠깐 편의점에도 들었었는데. 그 생각이 스치자마자 사쿠라이는 다시 뜀박질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늦지 않으리라 이를 갈면서.
"하아…."
만약 신이 있다면 지금 자신의 꼴을 바라보며 배를 잡고 웃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쿠라이는 땀범벅이 된 재킷을 펄럭이면서 머리를 헝클었다. 카페는 닫히고, 편의점에는 없고, 혹시나 해서 자신이 탔던 지하철의 분실물센터까지 방문했지만 반지는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돌고, 뛰고, 걷고. 한참을 헤매던 사쿠라이가 다다른 곳은 이자카야였다. 어젯밤, 오랜만에 회식 자리에 빠질 수 없어서 들렀던 그 곳. 만약 여기에도 없다면 사쿠라이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원래 있던 반지와 디자인이 같은 반지를 몰래 사던가, 아니면 집에서 쫓겨날 각오를 하고 오노에게 이 일을 알리던가.
[쇼, 오늘 늦어져?]
이런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타이밍 좋게 온 따듯한 오노의 문자에 사쿠라이는 이제 울고 싶어졌다. 문자 끝에 붙어있는 클로버 이모티콘은 따듯했지만, 저렇게나 따듯한 사람에게 반지를 잃어버렸다고 보고하는 상상을 하니 끔찍한 기분이 되었다. 분명, 상냥한 그 사람은 자신에게 괜찮다고 말할 것이다. 같이 찾아보자고 말할 테고, 그래도 찾지 못한다면 이런 일도 있는 것이라며 웃고는 혼자 속상해할 것이 분명하다. 절대 슬프게 만들지 않겠다고, 결혼식 날 그렇게나 당당히도 외쳤는데! 얼마 되지도 않아 이런 사고를 쳐버린 것에 사쿠라이는 오늘만큼이나 저 자신이 미웠던 적이 없었다. 하필이면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도 안 나서. 그 정도로 자연스럽게 있던 것이 어디로 쏙 사라져버린 걸까.
마지막 기대를 걸고 찾아간 이자카야에서 사쿠라이는 맥주를 시킬 수 밖에 없었다. 제 상실감과 절망감을 잊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반지라니, 저흰 맡은 게 없는데. 난처한 듯이 말하는 주인을 보며 사쿠라이는 제 인생이 끝나는 것 같은 절망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끝이다 끝. 여기도 없으면 더이상 들를 곳도 없는데. 풀이 죽어 안그래도 쳐진 어깨가 더 쳐져 있는 사쿠라이의 모습을 보며 주인은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앉으시겠냐며 사쿠라이에게 카운터석을 내주었고, 사쿠라이는 그대로 앉아서 제 미래를 상상해보기로 했다.
"쇼, 이게 뭐야?"
만약, 만약에 말이다. 새로 반지를 만들어서 끼고 갔다가 나중에라도 집에서나 반지를 찾게 된다면 큰일이 날게 분명했다. 또 하나 있는 반지를 들고 의아한 듯이 바라보는 오노를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목이 타는 것 같아, 사쿠라이는 괜히 제 앞에 있는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럼 두 개가 된 반지에 대해 설명해야 할 것이고, 잃어버린 줄 알고 나눠낀 반지가 아닌 똑같이 생긴 반지를 끼고 다녔다고 말해야 하고. 어느 쪽이던 끝은 사쿠라이가 집에서 쫓겨나거나 한동안 얼굴을 보지 말자며 오노가 훌쩍 떠나버리는 둘 중 하나 일 것 같은 생각을 떨칠 수 없어, 사쿠라이는 그 방법은 머릿속의 목록에서 지워내었다.
"…그걸 잃어버렸어?"
세상에 결혼반지를 잃어버리는 사람은 확률상 몇이나 될까. 다 세어본다 한들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평생 낄 거라며 호언장담을 하던 사람이 어느 날 와서는 반지를 잃어버렸다고 하면 얼마나 황당할까. 어이 없다는 듯이 오노가 노려보는 상상을 해보았지만, 오노라면 사쿠라이가 반지를 잃어버렸다고 화부터 내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사쿠라이가 봐온 오노를 토대로 진행하는 시뮬레이션에서는 그랬다. 그럼 화를 내지 않는다면, 어떤 반응이려나.
"…그렇구나."
아마 이럴 테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조금 슬픈 표정을 짓고, 한참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반지가 없나 함께 찾아봐 준 후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새로 반지를 맞추러 가자고 할 것이다. 솔직히 형이 화를 내는 것보다 이게 더 무서운데. 사쿠라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저에게는 말도 안 하고 혼자 마음고생을 할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솔직하게 그에게 말해도 문제일 것이다. 말하지 않는다면 더 큰 일이 되겠지만, 솔직하다고 해결되는 일은 아니었기에 사쿠라이는 머리를 싸맸다. 애초에 잃어버리지만 않았으면 되는 일을. 다 큰 어른이 그거 하나를 못해서! 저 자신에게 화가 나서 잔을 한 번에 비워버리며 사쿠라이는 한숨을 쉬었다. 딱 한 잔만 더 마시고 돌아가자. 돌아가서 싹싹 빌자.
[답장 늦어서 미안해요. 금방 들어갈게.]
제 마지막 말이 될지도 모르는 문자를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보내고, 사쿠라이는 지친 듯이 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형이 용서 안 해주면 어쩌지. 최악의 미래를 상상하면서.
* * *
이자카야에서 집은 멀지도 않았지만, 사쿠라이는 굳이 천천히 가는 길을 택했다. 저녁 내내 달리고 달렸더니 다리는 후들거렸고, 맥주까지 비워버려서 살짝 어지럽기까지 했으니. 그리고 무엇보다 오노 사토시의 남편으로 있을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르니 되도록이면 길게 밖에 있고 싶었다. 만약에 용서받지 못한다면 어디로 가야 하지. 도와주겠다며 자신을 놓아준 아이바의 얼굴을 떠올리며 사쿠라이는 괜히 사과의 말을 입에 담았다. 네가 한 몸 바쳐가면서까지 반지를 찾을 시간을 벌어주었는데, 결국엔 찾지 못하고 사형수나 다름 없는 기분으로 집에 돌아가고 있어, 아이바 군.
발걸음이 무거웠다. 집 바로 앞까지 와서 떡하니 사쿠라이-오노 라고 쓰여있는 팻말 앞에 서기까지 했는데도 사쿠라이는 쉬이 문을 열 생각이 없었다. 이걸 열면 오노가 어서 돌아오라며 따듯하게 자신을 맞아줄 테고, 저에게도 살짝 느껴지는 술 냄새를 맡아내고는 어디서 마셨냐며 물어올 것이다. 다음번엔 자신과도 마시자고, 냉장고에 있는 맥주를 살짝 흔들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 사쿠라이는 고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형, 나. 반지를 잃어버렸어.
그런 말을 대체 어떻게 해! 답답함에 현관문을 무심코 쾅, 하고 두드려버리자 얼마 되지 않아 문은 벌컥 열렸다. 아, 아직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벌컥 열린 문 사이로 평소에 자주 입는 검은 실내복을 입은 오노가 한눈에 봐도 당황한 표정으로 사쿠라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녀, 왔어요. 정리되지 않은 마음이었지만 일단 인사를 내뱉어보면 현관문을 두드린 범인이 사쿠라이임을 깨달은 오노가 안심한 표정으로 바로 그의 손을 잡아 끌었다. 놀랐잖아, 쇼. 은은하게 느껴지는 술내를 맡았는지, 아마 사쿠라이가 술주정을 부리느라 문을 두드렸다고 파악한 오노는 그대로 부드럽게 그를 한번 껴안았다.
"늦었어."
"금방 안 와서 미안해요. 기다렸어요?"
"아니, 지금 막 저녁 만든 참이었어."
쇼는 먹고 온 거지? 그렇게 말하면서 주방으로 향하는 오노의 뒤에 대고 사쿠라이는 그러고 보니 반지를 찾아다니느라 술만 마시고 아무것도 입에 넣지 못한 것을 기억해내, 아직이라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술 마시고 들어와서 당연히 먹은 줄 알았는데. 말은 그렇게 해도 일단은 2인분의 식사는 준비 되어있는 것 같아, 사쿠라이는 어정쩡하게 얼굴을 씻고 옷을 갈아입기로 했다. 만약 시간을 조종할 수 있었다면, 분명히 지금 이 순간을 10배 정도 늘렸을 테지. 반지를 잃어버렸다고 말하거나, 오노가 먼저 눈치채기 전인 이 마지막에 가까운 달콤한 시간을.
하지만 야속하게도 시간은 평소보다 빠르게 흘러가는 듯했다. 사쿠라이가 꾸물거리는 모습에 오노는 얼른 식기 전에 먹자며 그를 불렀고, 사쿠라이는 꼼짝 없이 테이블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마주 보고 앉으면 서로가 가까이에서 잘 보이니, 사쿠라이가 반지를 끼고 있지 않은 것을 오노가 눈치채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먼저 말하냐, 아니면 눈치채지느냐. 그 둘 사이에서 망설이던 사쿠라이는 후자를 택했다. 조금만이라도 더 오래, 남편으로 있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손에 들리는 멘츠카츠는 맛이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사쿠라이는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구분을 할 수 없었다. 오노의 눈치를 살피는 데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바람에.
"…쇼?"
걱정스럽게 부르는 오노의 목소리를 인식한 사쿠라이는 드디어 제 끝이 왔구나, 하고 젓가락을 떨구었다. 신이시여,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느님, 부처님, 오노님. 조금이라도 더 오래 행복을 느끼고 싶었습니다. 제가 아는 신이란 신에게 빌던 사쿠라이는 문득 오노의 시선이 자신의 손이 아닌 입가에 가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급하게 먹으면 체 해. 무슨 일 있었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어오는 그 모습에 사쿠라이는 안도 하면서도 제 양심에 찔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바보같이 반지를 잃어버리고 돌아온 사람인 줄도 모르고 걱정을 하는 오노의 모습에 사쿠라이는 크게 결심했다.
"형, 사실은…"
"응, 무슨 일이야?"
"사실은…"
그러니까. 평소에는 그렇게 청산유수로 나오던 말들은 거대한 댐에 가로막히기라도 한 듯이, 단 한 단어도 사쿠라이의 입 밖으로 흘러가지 못했다. 여기까지 와서 대체 무엇이 두려운 것인지. 이미 일은 벌려졌고, 양심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그에게 제 잘못을 고하고 용서를 비는 것이 먼저 아닌가. 그래도 미움받기 싫다는 어린 마음이 사쿠라이를 망설이게 했다. 만약 말해서 정말 형이 거리를 두자고 한다면? 자신에게 실망해서 떨어지게 된다면? 그런 상상은 하기도 싫었지만 지금 와서는 그런 생각밖에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상상들이 사쿠라이에게 가지 마라며 붙잡아두고 있었다.
어떻게든 이 일을 최대한 잘 설명할 길을 찾으며, 사쿠라이는 마주 보았던 시선을 천천히 내렸다. 도저히 얼굴을 보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반지를 잃어버렸어요. 그 한마디를 할 수가 없었다. 이 상황까지 와서 도망만 가다니. 자신이 한심한 것은 알았지만 사쿠라이는 도저히 그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꺼낸다 한들, 실망에 가득 찰 오노의 얼굴을 마주 보는 것은 더더욱 자신이 없었다. 기적같이, 반지를 지금 당장 찾을 수만 있다면 사쿠라이는 영혼까지 팔아넘길 수 있을 정도의 각오가 있었다.
그리고 신은 아무래도 그 거래를 받아 들인 모양이었다.
"어?!"
"까, 깜짝이야."
시선을 내려가던 사쿠라이에 눈 안에 들어온 것은 예쁜 오노의 손이었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붙잡았던 그 손, 자신이 반지를 끼워주었던, 그 예쁜 손가락에는 여전히 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다른 점이라고는 어째서인지 빛나는 것이 두 개나 있다는 점이었다. 왜 반지가 두 개나 있지? 생김새도 똑같은 두 개의 반자를 오노의 손가락에서 찾은 사쿠라이는 그대로 덥석 그의 손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게 뭐예요? 얼빠진 듯이 물어오는 사쿠라이의 목소리에 당황하는 것은 오노였다. 이게 뭐라니, 쇼가 준 반지인데.
제가 줬다고요? 사쿠라이는 황급히 오노의 손가락에서 두 개의 반지를 조심스럽게 빼내었다. 모양도 분명 결혼반지와 같고, 안에 새겨진 이니셜도 각각 O와 S, 누가 봐도 결혼식 날 수줍게 주고받았던 그 주인공이 맞았다. 사쿠라이는 당황하고 있었다. 그토록 찾아다니던 반지를 찾은 것은 좋았지만, 이것이 왜 오노의 손가락에 떡하니 끼워져있는지 도저히 기억을 해낼 수가 없었다. 대체 언제부터? 오노가 계속 끼고 있었다고 하면 저에게 반지가 없다는 것은 처음부터 알았다는 건가? 탐정 흉내를 내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사쿠라이는 이제 완전한 미아였다. 사건의 미궁속에 빠져 왔던 길도 되돌아가지 못할 정도의.
"후흐흥."
그런 사쿠라이의 모습을 보고 한발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오노는 이제 얼굴에 웃음꽃이 만연했다. 매일 힘이 들어가 버려서 빠릿빠릿하기만 하던 제 남편이 이렇게나 얼빠진 모습을 보여줄 줄이야. 멋있게 보이려고 잠버릇 때문에 머리가 헝클어져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순식간에 정리하던 그 사쿠라이 쇼가 다 풀어진 얼굴로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모습이라니! 만약 가능하다면 오노는 지금 이 상황을 전부 녹화해두고 싶을 정도였다. 제 인생에 아마 둘도 없을 진귀한 광경을 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제 욕심은 욕심이었고, 오노는 슬슬 사쿠라이를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계속 보고 있어도 질릴 일은 없겠지만, 언제까지나 고민만 한다 한들 지금의 사쿠라이는 아마 평생 이 반지가 왜 오노의 손에 끼워져있었는지 알 리가 없을 테니.
"어제, 기억 나?"
"어제…?"
"회식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 뭐 했는지 기억 나?"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깨닫지 못한 게 이상할 정도로 깔끔하게 어젯밤의 기억이 날아가있는 것을 자각한 사쿠라이는, 그제야 왜 자신이 반지를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할 수 없었는지 알게 되었다. 애초에 자신에게는 없는 기억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어제 취한 상태에서 반지를 어딘가로 옮기거나 잃어버린 것이었다면,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자신이 명확하게 무엇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으니까. 적당히 마셨어야했는데, 주변 분위기 때문에 깔끔하게 돌아갈 수 없었던 것이 원인이었다. 결과적으로는 그 술 때문에 반지도 빼먹고 다니는 사람이 되어버렸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어째서 반지는 오노의 손에 떡하니 끼워져 있는 것일까. 만약 취한 상태에서 반지를 잃어버렸다면 그대로 영영 찾지 못했을 텐데. 척 보기에도 다른 반지도 아니고 아무리 봐도 사쿠라이 자신의 반지인데. 그렇다면 이 반지를 집까지 가지고 오긴 했다는 것인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에 골머리를 앓으면, 이즈음에서 그만 놀려주어야겠다고 결심한 오노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쿠라이의 앞 까지 걸어와선, 척하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형?"
"너무 제 취향이신데요…"
"가, 갑자기 왜 그래요?"
"저랑 결혼해주시면 안되나요…"
어라, 이거 어디서 들어본 말 같은데.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사쿠라이의 손을 만지작거리던 오노의 모습은 사쿠라이를 가슴뛰게 하는 것과 동시에, 어쩐지 기시감이 들게 했다. 형이 취향이라고 말해주는 것은 기뻤지만 어디서 들어본 말 같단 말이지. 히죽여야하는지 망설어야하는지. 제대로 어떤 표정을 기어야할지 몰라 망설이는 그 모습에 방금 전까지 결혼해 달라는 영문 모를 소리를 내뱉은 오노는 한숨을 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예 잊었나보네. 사쿠라이는 알지 못할 말을 하고선.
"뭘 잊어요?"
"너 어제 나한테 이랬어."
내 손에 반지 껴있는 거 보면서 엉엉 울고, 자기로는 안되냐면서 급하게 네 반지를 내 손가락에…. 오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쿠라이는 새빨개진 얼굴로 그의 입을 막을 수 밖에 없었다. 미, 미쳤나봐. 내가 어제 그랬다고? 뿌옇게 안개가 낀 것 같은 기억 속을 차근차근 뒤져보던 사쿠라이는 분명 어제 오노의 손을 잡았던 것은 어떻게든 기억해내었다.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웃다가도 어딘가 수줍은 듯이 입을 가리는 오노, 저에게 내밀어진 똑같은 반지를 받아들고는 가볍게 제 이마에 입을 맞추던 그 입술. 낯부끄럽게, 쇼. 가슴을 간질이던 그 다정한 목소리.
아, 아아. 끊겼던 기억이 서서히 돌아오면서 사쿠라이는 제 얼굴을 가리는 것을 선택했다. 잔뜩 취해서 돌아와서는 이미 결혼하고 신혼여행 다녀오고 같이 사는 제 남편에게 결혼해 달라고 졸랐다 이거지. 사라질 수만 있다면 사쿠라이는 지금 당장 사라지고 싶었다. 쥐구멍이 있다면 들어가고 싶었고, 어제로 돌아갈 수 있는 타임머신이 있다면 얼마를 내던 제일 먼저 타고 싶었다. 반지를 잃어버리는 걱정만 했었지 설마 제 손으로 반지를 프로포즈라도 하는 마냥 내밀 줄 상상도 못했단 사쿠라이는 완전히 지쳐 테이블에 얼굴을 박을 뿐이었다. 오노에게 무어라 말해야 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뭘 그렇게 걱정해, 난 즐거웠는데. 그로기 상태가 된 사쿠라이와 반대로 오노는 완전히 생생해 보였다. 틈만 나면 사쿠라이를 놀리고 싶어 하는 오노에게 있어 그의 '두 번째 프로포즈'는 딱 좋은 건수였을 테다. 아마 앞으로 잊을 만 하면 이 일을 꺼내면서 사쿠라이가 얼마나 꼴사나운 모습으로 열정적인 고백의 말을 내뱉었는지에 대해 이야기 하겠지. 사쿠라이는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이 상황이 얼마나 오노에게 있어서 즐거운 상황인지는 이미 참을 수 없이 새어 나와 들리는 그의 웃음소리로도 짐작 할 수 있었다.
"결혼해주세요, 라니. 설마 쇼가 그럴줄은 몰랐지."
"형, 내가 다 잘못 했으니까…"
어쩌면 이것이 자신의 벌이라고, 사쿠라이는 아직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제 손가락에 끼워진 두 개의 반지를 만지작 거리는 오노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이제 아마 저 반지를 볼 때마다 이 일이 생각나겠지. 아무리 그래도 너무 부끄러운 짓을 했다는 생각에 손가락 하나 꿈쩍 하지 못하던 사쿠라이는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래, 어제 그렇게 다시 프로포즈를 했다 치자. 그리고 지금 오노의 손가락에는 확실히 반지가 두 개 끼워져 있다. 그렇다는건.
"어제 그…프로포즈 받아들인 거에요?"
"뭐야, 내가 뭐라고 했는지도 기억 안 나?"
평생 잊지 않을 거라며 펑펑 울더니만. 조금 퉁명스럽게 말하는 오노의 모습에 사쿠라이는 괜한 것을 물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오노의 답변을 종용했다. 그, 그래서 뭐라고 했던 거에요. 여기까지 와서 영 기억이 나지 않는 그 순간을 어떻게든 다시 한번 느끼고 싶어서 새빨개진 얼굴로 사쿠라이가 고하자, 오노는 즐겁다는 듯이 기지개를 쭉 펴고는, 제 손가락에 있는 반지를 살살 꺼내 사쿠라이의 손을 꽉 붙잡았다. 형? 오노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당황하는 사쿠라이에게 오노는 이번에는 잊지 말라는 듯이, 나직이 말했다.
"몇 번이고 받아줄 테니까."
이렇게 평생 사랑해 줘, 라고.
